HOME > 정보센터 > 관련뉴스

: 427

: 관리자 : 2019년 4월 10일 (수), 오전 11:13

[영화 속 그곳] 대지에서 피어난 할매들의 詩心
'시인 할매'들이 사는 곡성 서봉마을

(곡성=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차를 세우고 걸었다. 꽃샘추위라고 하지만 그래도 봄인데… 가는 길에 누군가 만날지도 모른다. 신작로 양쪽엔 밭고랑이 벌써 푸릇푸릇 고개를 내민다. 밭에 할매들이 없는 걸 보니 아직 농사일이 바쁠 때는 아닌가 보다. 백여 걸음이나 옮겼을까, 누가 봐도 농가라고 보기엔 특이한, 하얀색 담벼락이 나타났다. 푸른 하늘 밑에 새하얀 담장이라니. 어쨌든 제대로 찾았다. '길작은 도서관'

전남 곡성 서봉마을. 가는 곳마다 골목 담벼락에 할매들의 시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사진/권혁창 기자] 

전남 곡성 서봉마을. 가는 곳마다 골목 담벼락에 할매들의 시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사진/권혁창 기자]

동화의 나라 출입구 같다. 벽에 그려진 앙상한 나뭇가지 위로 검은색 실물 고무신이 주렁주렁 걸렸다. 바로 옆 흰 벽에 쓰인 글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잘 견뎠다' 첫눈에 봐도 심상치 않다. 뭘 견뎠다는 걸까. 

사박사박장독에도

지붕에도

대나무에도

걸어가는 내 머리 위에도

잘 살았다

잘 견뎠다

사박사박

- 윤금순 '눈' 전문

어디서 본 듯해서 얼른 시집을 꺼내 뒤졌다. '눈'이라는 시를 찾아냈다.

나이 여든을 넘긴 할매의 마음에도 하얀 눈은 시를 불러온 모양이다. 그런데 시엔 '장독에, 지붕에, 머리 위에 떨어지는 눈'을 보는 동심만 있는 게 아니다. "잘 살았다/ 잘 견뎠다/ 사박사박". 슬픔도, 고통도, 회한도, 내리는 눈을 보는 순간만큼은 새봄 눈처럼 스르르 녹아 없어졌는지 모르겠다.

서봉마을 할머니들이 모여 공부하고 시를 쓰는 '길작은 도서관' [사진/권혁창 기자] 

서봉마을 할머니들이 모여 공부하고 시를 쓰는 '길작은 도서관' [사진/권혁창 기자]

전남 곡성군 입면 서봉마을. '쬐그만' 시골 마을에 농사짓고 사는 할매들이 일을 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평생을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할매들이 뒤늦게 한글을 배우고는 내쳐 시집까지 냈다. 제목은 '시집살이 詩집살이'(북극곰, 2016). 그리고 이번엔 할매들의 시 쓰기를 다룬 영화까지 나왔으니, 일을 냈다는 표현이 과장은 아니다.

영화 '시인 할매'(연출 이종은)는 소박한 시골마을의 전원 풍경을 배경으로 마을 '길작은 도서관'에서 한글을 배운 할매들이 서툴지만 아름다운 시를 써가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김선자 도서관장은 도서관에서 할머니들이 책을 거꾸로 꽂는 것을 보고 2009년 한글교실을 열었고, 그게 시작이었다.

영화 '시인 할매' 스틸컷. 곡성 서봉마을 할머니들이 마을 도서관에서 시를 쓰고 있다. [스톰픽쳐스코리아 제공] 

영화 '시인 할매' 스틸컷. 곡성 서봉마을 할머니들이 마을 도서관에서 시를 쓰고 있다. [스톰픽쳐스코리아 제공]

할매들은 어린 자식이 글자를 물어올 때 가장 애가 탔다고 한다. "니 아부지 오면 물어봐라"고 했더니 데굴데굴 구르며 울었을 때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윤금순 할머니는 이런 글을 쓴다. "전기세 같은 종이가 나오면 볼 수 없었다/ 지금은 간판도 보고 차 번호도 본다/ 남편이 군대 갔을 때는 편지도 쓰고 싶었다/ 받아 볼 수만 있다면/ 천국에 있는 남편에게 쓰고 싶다/ 나 잘 살고 있다고."

글을 깨친 할매들은 철 지난 달력 뒷장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삐뚤삐뚤, 맞춤법도 무시하지만, 할매들의 시엔 삿됨도, 관념도, 권력도 없다. 대지에 맨발 딛고 흙에 살갗 부비며 산 나날의 흔적이 날것 그대로의 진심을 전해올 뿐이다.

할매들의 시 쓰기 [스톰픽쳐스코리아 제공] 

할매들의 시 쓰기 [스톰픽쳐스코리아 제공]

서봉마을은 곡성 동악산(735m) 자락 밑에 똬리를 튼 작은 마을이다. 팔공산에서 발원한 섬진강이 마을 북쪽에 흐르고, 동네 어귀엔 느티나무가 수호신처럼 서 있다. 보이느니 산과 논과 밭과 온갖 푸성귀들이 몇 안 되는 인가(人家)를 둘러친 심심산골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 이 길을 울며 들어왔다던 김점순 할머니가 떠올랐다. 

열 아홉에 시집왔제

눈이 많이 온 길을

얼룩덜룩 꽃가마를 타고

울다가 눈물개다

울다가 눈물개다

서봉 문 앞에까장 왔제

고개를 숙이고 부끄라서

벌벌 떨었어

- 김점순 '시집1' 부분

※ 이 글에 실린 시(詩)들 중 서봉마을 벽에 붙은 작품과 
영화 '시인할매'에 나온 것 외에 일부는 시집 '시집살이 詩집살이'(북극곰, 2016)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faith@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9/04/10 08:01 송고

출처: https://www.yna.co.kr/view/AKR20190314165900805?section=search

첨부파일
목록으로